카토 우티켄시스와 그의 아내 마르키아 역사

안녕하세요. 오늘은 '카토 우티켄시스'와 그의 아내 '마르키아'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카토 우티켄시스는 흔히들 '소(小)카토'로 알려진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입니다.
공화정 말기, 키케로,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등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등과 대립한 걸로 유명하죠.
또한 카토는 스토아 학파 출신다운 금욕적인 생활과 강직함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특히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이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이 자살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 단테 등이 『신국론』과 『신곡』에서 거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카토에게도 부인 마르키아와 관련해서는 생전에 굉장히 논란거리가 된 사연이 있습니다.
카토는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혼전순결인 상태로 아틸리아란 여인과 첫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긔의 첫 결혼생활은 아틸리아의 부정에 의해 결국 끝이 나고 맙니다.
홀몸이 된 카토는 키원전 63년 무렵 '필립푸스'의 딸 '마르키아'와 재혼을 합니다.
카토카 기원전 95년생이니 우리나이로 치면 33살 정도군요.
마르키아의 경우 정확한 출생년도를 알 수 없지만 영문 위키에서는 대략 기원전 8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33살에 아이가 둘 딸린 돌싱남이 18살의 처녀랑 재혼하다니 부들부들
둘의 부부관계는 꽤나 원만했던 걸로 보입니다.
기원전 56년, 카토의 나이 마흔이었을 때 마르키아가 임신했었다고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하고 있으니깐요,
바로 그때 희대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카토가 동료인 퀸투스 호르텐시우스의 요청에 따라 아내와 이혼한 다음, 그녀를 호르텐시우스에게 보낸 겁니다.

흔히들 키케로와 함께 엮이다 보니 착각을 많이 하지만
카토는 동료인 키케로(기원전 106년생), 정적인 폼페이우스(기원전 106년생)보다 10살 이상 어립니다.
심지어 호르텐시우스는 기원전 114년생으로 카토와는 근 20년 차이가 나는 인물이었죠.
플루타르코스는 카토의 절친한 친구였다가 나중에 좀 틀어진 무나티우스의 말에 따라
호르텐시우스가 카토와 더 가까워지기 위하여 카토에게 딸(!) 포르키아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했다 합니다.
참고로 포르키아는 기원전 70년생으로 호르텐시우스와 44살이나 차이가 났고
심지어 그 당시 비불루스와 결혼하여 우리나이로 고작 15살이었는데 아이들 둘이나 둔 상태였습니다.

아무리 결혼이 혼잡스럽게 이뤄지던 당시 로마에서도 이런 일은 매우 이례적인 지라
호르텐시우스는 진땀을 흘리며 갖가지 말로 카토를 설득하려 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전합니다.
한창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인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나 
너무 많은 아이를 가지면 남편에게 짐이 되는 건 나라 전체를 봤을 때 별로 유익하지 않지만  
포르키아가 자신의 아이를 낳는다면 훌륭한 집안이 후계자를 나누어 가지는 것이니 유익하다는 둥,
만약 포르키아가 자신의 아이만 낳아준다면 다시 비불루스에게 돌려주겠다는 둥의 얘기를 늘어놓습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제안에 카토가 출가외인인 딸을 줄 수는 없다며 정중히(!) 거절하자
호르텐시우스는 그렇다면 포르키아 대신 카토의 아내 마르키아를 달라고 얘기합니다.
문제는 이런 미친 호르텐시우스의 제안에 카토가 마음이 흔들려 승락했다는 겁니다. 로마판 막장 드라마 하악
대신 마르키아의 아버지 '필립푸스'의 허락을 받는다면 이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요.
그걸 또 필립푸스가 덜컥 허락하는 바람에 결국 마르키아는 호르텐시우스와 재혼하여 그의 아이를 갖습니다.

이 일은 세간에 적잖이 화제가 되었던 걸로 보입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훗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에 내전이 발발하자(기원전 49년)
카토는 카이사르와 싸우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여 로마를 떠나는데
이때 호르텐시우스가 죽어(기원전 50년) 그의 재산을 상속받을 아이를 가진 마르키아를 다시 아내로 맞이한 다음
로마의 가산과 식솔을 모두 그녀가 관리하게 합니다.
아피아누스는 호르텐시우스 사망과 무관하게 그녀가 출산한 후 카토가 바로 다시 데려왔다는 식으로 썼는데
뭐 어느 쪽이든 카토는 막대한 재산을 가지게 된 마르키아와 재결합을 한 거죠.
카이사르는 이러한 카토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아내를 사랑하면 왜 타인에게 주었고 사랑 안했으면 왜 다시 데려왔냐? 돈 때문이냐?'라 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의 이 비난을 실은 플루타르코스는 카토의 평소 성품을 볼 때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비판하지만요.
어쩌면 카토가 NTR 기질이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이를 이해 못했을 수도...

아피아누스는 '불임인 아내와 결혼한 호르텐시우스가 아이를 갖고 싶었기에 마르키아를 원했다'고 하지만
호르텐시우스에게는 마르키아보다 어리지는 않은 걸로 추측되는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다는 점에서
아피아누스의 설득력을 약하게 합니다.
그런데 카토에게는 출산한 경력이 있는 심지어 카이사르하고도 염문이 날 정도로 성욕이 왕성한 세르빌리아 등
누이가 둘이나 있었음에도 굳이 한참 어린 마르키아나 포르키아를 원했던 걸 보면
호르텐시우스는 정말 아이를 갖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이로 예순이 얼마 남지 않았던 호르텐시우스의 집념에 박수를. 그냥 어린 여자가 좋았던 거?
오늘날 역사가들은 호르텐시우스의 의도가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등과 맞서기 위해
카토와 호르텐시우스 등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앞서 플루타르코스가 전한 호르텐시우스의 의도를 미는 셈이죠. NTR로 연대감을 얻다니 ㅎㄷㄷ

하지만 카토를 비롯한 당시 공화정 주요 정치가들의 혼맥을 보면 과연 그럴까 하고 의구심이 듭니다.
일단 마르키아의 아버지 필립푸스의 예를 보겠습니다.
그는 기원전 60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적어도 기원전 99년생 이상임을 의미합니다.
키케로와 거의 비슷한 또래였다고 보여지네요.
그도 사위인 카토처럼 재혼을 하는데 그 상대가 바로 카이사르의 조카 '아티아'(기원전 85년생)입니다.
아티아의 아들이 그 유명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니 결국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버지인 셈이죠 ㅎㄷㄷ.
앞서 언급된 카토의 딸인 포르키아의 경우도 살펴봅시다.
포르키아는 비불루스가 카이사르-폼페이우스 내전에서 사망한 다음 재혼하는데 상대가 바로 '브루투스'입니다.
정리하면 '카토의 장인'은 '카토의 정적 카이사르'의 조카와 결혼하여 그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를 양자로 뒀고
'카토의 딸'은 아버지의 정적인 카이사르에게 남편을 잃고 훗날 그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브루투스'와 재혼한거죠.
뭐 카이사르와 염문났던 세르빌리아나 카이사르와 브루투스의 관계 등을 고려하면 혈연, 혼맥은 더욱 꼬여갑니다.
이런 수준인데 과연 카토-마르키아-호르텐시우스의 관계가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네요.

그냥 로마 공화정 당시 혼맥은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가-재별들 혼맥을 꺼지라고 할 정도로 복잡했다 정도 같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관계가 '카틸리나'가 키케로, 카토는 물론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에게까지 공격받은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번역어 '문민(文民)'의 유래 역사

안녕하세요.
얼마 전 모 블로그에서 어떤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링크)
2005년에 국방연구원이 주최한 포럼에서 국방연구위원이었던 문영일이 발표한 글이었는데
당시 참여정부의 국방개혁이 지나치게 문민 중심이고 이로 인해 문약화가 우려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글이야 참여정부 당시 은연중 퍼져 있던 '정권에 대한 군의 반감'을 고려한다면
딱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 글에서 제 눈에 확 들어왔던 것은 문영일의 '문민(文民)'이란 단어에 대한 고찰이었습니다.
오늘날 문민통제로 번역되고 있는 'civilian control'에 대해
문영일은 '문민통제'가 아니라 '시민통제'가 타당한 번역이라고 주장합니다.
'civilian'이 '직업 군인이 아닌 일반 국민'이라는 의미의 문민과 맞지 않고
'어떤 사회나 국가의 구성원, 또는 구성원 전체'를 의미하는 '시민'과 부합한다는 얘기죠.

이러한 주장은 아쉽게도(?) 사실이 아닙니다.
옥스포드 사전에 따르면 civilian은 '군대 혹은 경찰에 복무 중이 아닌 사람'을 뜻합니다.(링크)
롱맨 사전 역시 이와 비슷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링크)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 유이한 합법적 폭력으로서 군대와 경찰이 갖는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할 때
'현역군인(때로는 현역경찰까지 포함)을 제외한 시민'의 군 통제(견제)가 반드시 필요한 만큼
civilian control은 '문민통제'에 좀 더 부합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민'이라는 단어가 좀 눈에 띕니다.
'현역군인 또는 현역경찰이 아닌 시민'이라는 의미를 담는 단어로서 문민은 뭔가 확 와닿는 단어는 아닌 듯 합니다.
 문영일 역시 그런 뉘앙스로 '지극히 군에 대한 반동(?)적 용어'로
'무식하고 야만적인 군대(인)에 비하여 유식하고 개화된 정치인(지식인)을 지칭하려고 만들었다'라고 추측합니다.

문영일의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기 전 '문민'이라는 단어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1989년 초판(1990년 2쇄)본 『동아 새국어사전』에는 '문민'이 오늘날 의미대로 정의되어 있지만
보다 앞선 시기(1989년 1월) 출판된 『민중 엣센스 국어사전(3판)』에는 '문민'이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전들도 수록한 경우도 있고, 수록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전에는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문민'을 수록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문민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만 해도 표준어로서 확고한 지위를 갖지는 않았다고 봐야겠죠.

그렇다면 문민이란 단어는 문영일이 말한대로 문민정부 출범을 전후로 국내에서 만든 번역어 일까요?
2014년 출간된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에서 '문민의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문민은 'civiian'의 일역된 文民(bunmin)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으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간혹 우리나라 언론 등에서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동아일보》1963년 11월 15일자 기사 '市民社會의 領導者의 發言은 常識的이어야 한다'에서는 
'군복을 벗고 문민으로 돌아왔다고 하는 박정희씨의 입에서'라고 나와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civilian을 文民으로 번역하게 되었을까요?
civilan control을 '(군인을 포함한)시민의 통제'라고 주장한 문영일이 보면 좀 뜨끔한 사연이 있습니다.

A: '平人'으로 하면 어떨까요? '凡人'이라고 해도 거의 같은 뜻이지만.
B: '文化人'이라는 말도 생각해 볼 만하군요.
C: peaceful pursuit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취지니까 '平和業務者'라고 하면 되겠죠.
D: '民人'은 어때요? 『大英和辭典』에 따르면 군인과 성직자를 제외한 사람입니다.
E: '文人'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B: 『言苑』에 '文臣'이란 말이 있어요. 文官이라는 뜻으로 武官과 대비되는 말입니다.
F: 軍部大臣文官制에서의 文官의 의미로 해석될 소지가 없을까요?
G: 臣에는 군주의 신하라는 뉘앙스가 있으니까 '文民'으로 하면 어떻습니까?

위는 《마이니치신문》이 '1946년 9월 일본 의회 제국헌법 개정안 특별위원회 소위원회 속기록'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합국 총사령부(GHQ)의 헌법 초안에 추가를 요한 조항,
'Prime Minster and all Ministers of the State shall be civilians' 중 civilan 번역에 대한 논의죠.
막 나가는 일본 군부로 인하여 단지 군부만 막 나갔을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는 인식 하에서
보다 철저한 군부에 대한 통제를 모색하다 보니 번역어 '문민'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보면 civiian이 文民으로 번역되게 된 계기 자체가
한국에서 정식으로 자리잡게 된 배경인 '문민정부의 수립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단어가 뭔가 미흡해 보인다는 점은 안타깝지만 말이죠.

<참고도서>
이한섭 지음,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사전』(고려대학교출판부, 2014)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 2000)

토크빌의 예언(?) 역사

안녕하세요.
오늘은 『미국의 민주주의』로 유명한 토크빌(A. Tocqueville)의 예언(?)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미국의 민주주의』의 한 대목부터 보겠습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위대한 두 민족이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같은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러시아인들과 아메리카인들이다. 양자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성장했다. 인류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려 있는 동안에 그들은 갑자기 선두대열에 끼어들었고 전세계가 거의 동시에 그들의 존재와 위대성을 인식했다.
 다른 모든 나라들은 거의 자신들의 자연적인 한계에 이른 것 같다. 또한 그들은 자기네들의 세력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하다. 그러나 그들 두 민족은 아직도 성장하는 추세에 있다. (러시아의 인구는 구세계의 어느 다른 나라의 인구보다 비교적 빨리 증가하고 있다.) 다른 모든 민족들은 성장을 중단했거나 지극히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아가고 있다. 그들만이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따라서 쉽게 그리고 신속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메리카인은 자연이 내미는 장애에 대항해서 투쟁한다. 러시아인의 적은 인간들이다. 아메리카인이 황무지와 미개인에 대항해서 싸운다면 러시아인은 모든 힘을 다해서 문명과 싸운다. 아메리카인은 쟁기로 정복하지만 러시아인은 칼로 정복한다. 영국계 아메리카인은 개인의 이익에 의거해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고 국민의 매이지 않은 힘과 상식이 제약을 받지 않은 채 발휘되도록 한다. 러시아인은 단 한 사람에게 사회의 모든 권위를 집중시킨다. 아메리카인의 주요수단은 자유인 반면에 러시아인의 그것은 예속이다. 그들의 출발점은 다르며 가는 길이 같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지구 반쪽의 운명을 각각 지배하도록 하늘의 계시를 받은 듯하다.

인용한 부분은 무려 『미국의 민주주의』1권의 맨 마지막 부분입니다.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미국의 민주주의』 1권의 결론 부분을 미국과 러시아의 대조로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영국빠였던토크빌이 신흥강국 미국의 대척점으로 러시아를 생각하고 있으며 그를 많이 의식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 』2권 결론에서 자신은 바라지 않지만
'나름대로 미덕이 있지만 자기가 봤을 때 별로인평등한 민주사회'가 앞으로 올 신세계의 사회상이 될 것이라 예측합니다.
즉, 미국은 새로운 세계(대중사회)의 대표라는 것이죠.
따라서 이에 반대되는 러시아는 '옛 세계의 안 좋은 요소(전제군주, 예속 등)를 모두 결집시킨 대표'가 됩니다.

토크빌의 이런 예측은 40년 뒤 비스마르크의 봉쇄정책 때문에
1차 세계대전까지 러시아에게 줄곧 러브콜을 보내야만 했던 프랑스를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게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감히미국의 주적(!)으로 부상한 러시아의 후예 '소련'을 생각할 때는 묘한 느낌도 들구요.
누군가 소련 시기 줄곧 계속된 막장짓이 사실은 유럽의 자기파괴적 역사의 최종판인러시아 역사의 연속성 때문이라 하던데
토크빌의 예언(?)이랑 함께 생각해 보면 흥미로울 거 같습니다.

- 참고도서 -
A. 토크빌 지음, 박지동 옮김, 『미국의 민주주의』 1, 2권(한길사, 1983)
J.P.메이어 지음, 이창극 옮김, 『토크빌 평전』(을유문화사, 1973)

1932년 독일 의회 선거 역사

안녕하세요.
언젠가 독일인들의 역사 반성딱히 반성하는지 잘...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중
독일인들은 나치의 집권에 대해 처음부터 동조했다는 주장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살짝 글로 남겨볼까 합니다.

히틀러 지휘 하에서 나치가 대약진한 선거인 1932년 7월 31일 의원 선거에서
나치는 유휴투표의 37.3 퍼센트, 1374만 5천 여 표를 획득, 230개 의석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는 2년 전인 1930년 의원 선거에서 나치가 거둔 18.3 퍼센트의 두 배에 해당합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 나치의 급성장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세 뒤에 1930년대 초반 나치의 어려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조짐은 1932년 7월 선거 이전부터 보였습니다.
같은 해 4월 프로이센 지방의회 선거에서 나치는 36.3 퍼센트의 득표를 얻었고
이로 인해 사회민주당-중앙당의 연립내각을 붕괴했습니다.
하지만 그 내각은 같은 7월 파펜(F. Papen)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기 전까지
과도적인 관리내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는 32년 4월 프로이센 선거에서 나치가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철천지 원수(?)인 공산당, 국가인민당과 연립하지 않는 경우 집권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특히 프로이센 지방의회 선거는 나치가 온 열성을 다 한 선거였는데도 불과하고
1퍼센트의 득표 증가 밖에 이뤄지지 않아서 당 지도부는 더욱 충격을 받게 됩니다.

더 충격적인 결과가 나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히틀러(A. Hitler)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전임 브뤼닝(H.Brüning)에게 했던 것처럼
나치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것을 깨달은 파펜은 1932년 9월 소집된 의회를 해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932년 11월 6일 선거는 승승장구하던 나치의 발목을 잡습니다.
나치는 1173만 표(유효투표 33.1 퍼센트)를 얻으며 196개의 의석수 만을 거둡니다.
200만 여표가 감소했고 의석수는 34개나 줄어 들었습니다.
그 빈 자리를 차지한 건 600만에 가까운 표를 얻었던 공산당 외 정당들이었죠.

이전 선거에서 나치를 강력하게 지지하여 전국정당으로 발돋움하게 했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포메른 등에서도 지지를 상당히 잃었다는 점에서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기존에 막대한 빚을 져서 선거전에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없던 사정을 감안한다 해도
저 농촌 지대에서 지지가 감소한 것은 나치에게는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던 거죠.
그 이후 전개된 지방선거에서도 침체는 계속되어
대립하던 파펜이 마치 승자처럼 히틀러를 대하기도 하고 히틀러가 베를린을 피하기도 합니다.

1933년 1월, 독일 귀족 간 정략 속에서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하고
기업들의 막대한 지원과 반대세력들에 대한 강력한 탄압 속에서 치뤄진
1933년 3월 6일 선거에서 이르러서야 나치의 지지는 회복됩니다.
1727만 2700표(유효득표 43,9 퍼센트)를 얻어 288석을 차지하였죠.
그럼에도 사회민주당과 중앙당, 그리고 공산당에 가해진 탄압을 생각한다면
과연 선거결과가 독일인들의 절대지지를 의미하는 것일지 회의적입니다.
적화에 대한 우려 속에서도 사회민주당과 중앙당에 대한 지지가 계속되었고
심지어 공산당 역시 의원들이 다 잡혀가는 가운데서 고작 19석만을 잃었을 뿐입니다.
히틀러가 선거 결과를 보고받고 연정 파트너인 국가민족당에게 끌려갈 걸 우려했을 정도죠.
과반 정당이 되지 못해 수권법 제정 당시 썼던 꼼수를 생각하면...

결국 나치가 집권하는데 독일인들이 열성적으로 지지했다는 견해는
집권 과정에서 이뤄진 광기어린 대중선동과 그에 대한 호응이 가져온 착시효과의 결과겠죠.
도리어 나치, 공산당 등 좌우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판국에서
사회민주당과 중앙당이 항상 30~50 퍼센트를 득표하던 걸 생각한다면
독일인들이 용케도 잘 버텼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참고도서>
윌리엄 카 지음, 이민호·강철구 옮김, 『독일근대사(개정증보판)』(탐구당, 1998)
요아힘 C. 페스트 지음, 안인희 옮김, 『히틀러 평전 1, 2』(푸른숲, 1998)

닉슨(Nixon)의 2차 방한(訪韓) 역사

안녕하세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시끄러운(?) 요즘, 원조(?) 게이트의 주인공 닉슨(R. Nixon)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닉슨과 한국,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와의 악연은
전 외무부(현 외교부) 장관인 이동원의 『대통령을 그리며』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1960년 미국 대선에서 케네디(J. Kennedy)에게 참패하고
심지어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낙선한 닉슨은 일반인 신분으로 1966년 한국을 찾습니다.
뭐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여러 국가를 방문하던 차에 한국도 1박 2일 일정으로 온 것이죠.

참고로 닉슨의 1차 방한은 1953년 11월, 그가 부통령 재임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휴전 협약이 이뤄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또 그가 부통령이란 어마어마한(?) 지위에 있던지라
그 응대가 어마어마했습니다.
3박 4일 일정 동안 여의도 공항 영접부터 시작해서 100만 환영 인파 속 도심 행차, 국회 연설, 중앙청 환영대회 등
'국빈은 이런 것이다'를 제대로 보여주는 환영을 받으며 그 자신도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합니다. 
요즘 미국 대통령 방한도 저리는...
그런 그가 13년 만에 찾은 한국에서는 씁쓸한 냉대를 겪게 되었던거죠.

그런데 당시 닉슨을 영접했던 또 다른 인사인 김영주의 얘기는 이동원의 회고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닉슨의 2차 방한 당시 외무부 차관이었던 김영주는 자신의 저서 『外交의 經驗과 斷想』에서
한미국대사관에서 열렸던 닉슨 환영 만찬에 참가했던 일을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선 닉슨의 외모에 대한 언급부터 살펴보죠.
이동원, 김영주 두 사람 모두 닉슨이 달변가였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하지만 이동원은 닉슨의 대 한국 정책을 박정희와의 개인적 은원 관계에서 검토하는 입장이어서 그런지
닉슨의 첫인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얼굴 때문에 케네디에게 졌다는 평이 틀린 게 아니라든지, '범죄형 얼굴'라든지 말이죠.
반면 김영주는 당당한 체격에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호남아' 스타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닉슨 사진을 보고 누가 더 옳은지 각자 판단합시다.

두 사람의 회고에서 차이가 가장 큰 점은 베트남에 대한 닉슨의 견해였습니다.
이동원에 따르면 닉슨은 이동원에게 존슨(L. Johnson)의 대베트남 정책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을 했다고 합니다.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 자체부터 잘못'이지만 '개입했으면 남자답게 싸워야지'라고 말이죠. 돌깡패!!
반면 김영주는 자신이 베트남전쟁에 대해 닉슨에게 묻자
'닉슨은 대체로 존슨의 정책을 지지하지만 월맹에 대해 좀 더 강력하게 압박해야 협상에 응하지 않겠냐' 정도의
소극적인 답변을 했다고 말합니다.
과연 두 사람에게 닉슨이 다른 말을 했는 걸까요, 아니면 닉슨에 대한 인상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르게 해석을 낳았을까요?
그냥 영어 실력 차이였을지도...

닉슨이 2차 방한 당시 박정희에게 그리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에
이동원과 김영주 모두 동의하는 바입니다.
다만 박정희와 친했던 이동원은 끈 떨어진닉슨을 환대하자는 얘기에 박정희가 마뜩잖게 여겼다며
이러한 박정희의 태도가 훗날 미국의 지도자와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날려 버렸다면서 안타까워합니다. 
박정희 닉슨 둘 다 까기?
반면 김영주는 '전 부통령'에 불과한 일반인 신분의 닉슨을 국빈 차원에서 환대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며 회의적입니다.
박정희와 닉슨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신경 쓴 '정치인' 이동원과 정계와는 거리가 있던 '외교관' 김영주의 차이라고 할까요?
차관 출신이 정계와 거리가 멀 수 있나?

<참고도서>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고려원, 1992)
김영주, 『외교의 경험과 단상』(인사동문화, 2004)
서울신문 특별취재팀, 『한국외교비록』(서울신문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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